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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전

사도세자 이선

사계(四季) 2014.10.06 13:59





(출처 : 나무위키)


 

사도세자 이선은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이복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그는 생후 1년만에 원자 정호를 받았는데 그가 태어날 때 부왕 영조는 친히 모친 영빈 이씨의 출산 장면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영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그는 후궁 출신 서자였지만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가 되고, 모친인 영빈 이씨의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부왕 영조를 적대시하던 선의왕후 어씨가 거처하던 저승전으로 세자는 그들로부터 경종 독살설과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접하게 된다. 이때 저승전의 나인들 중 한상궁과 이상궁이 주로 세자를 대하였는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역할을 분담하여 세자를 훈육하였다고 한다. 그는 영조의 맏아들이며 이복 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었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으며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0세 때 노론 출신 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고 딸이 세자와 가례를 올린 뒤 홍봉한과 홍인한은 과거에 급제하고, 홍봉한은 과거 급제 후 10년도 안돼 종2품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이 되는 등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는게 세자의 도리라고 해서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이상궁과 한상궁이 칼과 칼집을 가지고와 전쟁놀이도 하였다. 나이 어린 세자가 노는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사도세자는 자기 어머인 영빈 이씨한테 전쟁놀이를 하였음에도 소학과 학문을 하였다고 거짓을 고하는 등 날이가면 갈수록 거짓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냈다고 한다. 영조는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었고 이일로 인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영조를 두려움과 무서워했으며 영조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공포증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영조 주변에서도 그의 후계자로서 곧 세자로서 자질에 의문을 표하고 적대적인 이들이 많았다. 김상로, 홍계희 등 노론 중진과 노론 출신 왕족인 김한구,

 

김귀주 등도 그를 공격했는데 노론측은 그가 정신병을 앓았다고 계속 공격했다.



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까닭으로 세자에게서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호통과 때로는 폭설을 들으면서도 세자는 세자된 책임으로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1750년 혜경궁 홍씨로부터 첫 아들인 세손 정(琔)이 태어난다. 세손 정의 출생으로 갈등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영조는 남자가 귀해진 왕실에서 그것도 늘그막에 본 귀한 손자라 퍽 이뻐하였고 사도세자는 아들인 세손을 방패 삼아 영조의 불호령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라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유아임에도 앓았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 함이라며 다시 세자에게 칼날을 세웠고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세손 정은 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고, 세자는 부왕과 갈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1752년 둘째 아들 산을 출산한다. 그가 후일의 정조가 된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등 형편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여 백성들의 짐을 경감시켜 주었고, 가난한 평민들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이런 선정으로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의 온양 행궁 때는 백성들로부터 열의와 같은 환호를 받았다.

1762년 6월 14일(음력 5월 22일) 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어 세자의 위를 폐하려 하였다. 이어 윤(閏) 5월 또다시 세자를 둘러싸고 여러 말들이 나돌게 되었다. 뒤에 누군가의 사주로 밝혀져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나경언 사건으로 영조와 세자 사이는 크게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세자는 영조에게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버렸다고 한다.

그해 세자는 갑자기 평안도를 다녀오게 된다. 그러나 그가 동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김상로 등이 영조에게 고해바치자 그는 평안도에 간지 하루 만에 말을 타고 한성부 세자궁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영조는 그가 평안도에 다녀온 것을 눈치챘고, 세자궁 근처에 땅을 파놓고 창과 방패, 말 등을 숨겨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노론에서는 그가 역모를 꾸민다고 거듭 탄핵하였고,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그를 포기하고 영조의 편을 들게 된다. 영조는 또 어느날 밤 꿈에 그를 양자로 입양한 자신의 원비 정성왕후가 나타나 그가 역심을 품었다고 계시하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법적 모친의 계시와 생모의 비판 등으로 그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1762년 7월 4일(윤5월 13일) 결국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세자를 가두었다. 그 뒤 누군가가 세자가 갇힌 뒤주의 틈으로 미음(죽)과 물을 넣어준다는 것을 안 영조는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는다. 그로부터 3,4일 만에 세자는 뒤주에서 굶어죽고 만다. 8일 뒤인 7월 12일 사망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정조는 1777년(정조 1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아버지의 시호를 상시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한편 세자가 비밀리에 도움을 청했던 조재호 등은 위리안치 후 사사되었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현위치(경기도 화성시)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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